학습자료실

[보충자료] 교육학 자료 - 한국교육사 - 갑신정변
Date. 2004.03.03
[보충자료] 교육학 자료 - 한국교육사 - 갑신정변 *** 갑신정변 *** 1884년 갑신정변 당시 김옥균은 34세였다. 그는 22세 때 과거에 장원급제했으나 출세의 길을 좇기보다는 서양의 선진 문물을 받아들여 나라를 개혁해야 한다는 개화사상에 흠뻑 빠져 있었다. "일본이 동방의 영국 노릇을 하려 하니 우리는 우리나라를 프랑스로 만들어야 한다"는 게 김옥균의 소망이었다. 당시 그는 3년간 매년 일본을 찾아가 개화운동에 필요한 자금을 모으려 했으나 번번이 실패했다. 그러나 그해 드디어 조선을 장악하고 있던 청(淸)의 세력을 축출하려는 일본의 협조를 약속받고 거사를 일으켰다. 우정국 개설 피로연이 열리는 날을 택해 왕과 왕비를 창덕궁에서 경우궁(현재 서울 계동 현대그룹 사옥 자리)으로 옮기고 정권을 장악했다. 일본군 2백명과 조선군 50여명이 동원됐다. 거사 이튿날 새 정부 조직과 구성원이 발표됐다. 김옥균을 비롯해 홍영식.박영효. 서광범.서재필 등 양반 출신 청년 지식인들이 정부 요직을 차지했다. 다음날 개혁정치의 내용을 담은 14개조의 \`신정강\`이 발표됐다. 문벌을 폐지하고 백성의 평등권을 인정하며 간리(奸吏)와 탐관오리를 처벌하는 등 한반도 역사상 최초의 \`위로부터의 개혁\`이었다. 하지만 명성황후의 요청을 받은 청의 위안스카이(袁世凱)가 군사를 이끌고 개화파를 공격하자 세(勢) 불리를 느낀 일본이 약속을 저버리고 군대를 철수하는 바람에 갑신정변은 \`3일 천하\`로 끝나고 말았다. 갑신정변에 대한 평가는 시대와 관점에 따라 엇갈린다. 흥미로운 것은 박정희 정권과 북한 김일성 정권은 한결같이 \`자주적 근대화 운동\` \`부르주아 혁명\`이라고 높이 평가했다는 점이다. 박노자(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교수는 국가가 무소불위의 힘을 바탕으로 근대성을 쟁취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두 독재자가 최초로 부국강병 프로젝트를 구성한 김옥균 등을 선각자로 인식한 것은 오히려 자연스러운 결과라고 지적한다. 그러나 요즘엔 부정적인 평가가 더 많다. 청년 정치가들의 무모한 돌발 행동으로 개화세력이 엄청난 타격을 입어 그후 개혁 활동이 진척되지 못한 점, 일본군에 의지한 점, 무고한 백성의 희생을 불러온 인권의식의 결핍 등이 1884년 갑신정변의 한계로 꼽힌다. 1백20년이 흘러 다시 갑신년이다. 대통령 특검.총선 등으로 정변(政變)이 예고되어 있다. 2004 갑신정변은 어떤 모습일까. - 자료출처 : 중앙일보 04. 01. 01 : 이세정 논설위원 -